수납장/모음집

공민왕

범단 2014. 1. 5. 23:25

벌레 먹은 장미

공민왕

 

 

 

 

노국공주와 공민ㅁ왕의 초상화

 

고려는 제31대 공민왕(恭愍王) 시대에 실질적으로 막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려가 조금 더 국가로서의 위용을 대내외에 과시하며 오래도록 융성하려면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성공했어야 한다. 그것은 공민왕이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정권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의 부패는 100년 가까이 계속된 원나라의 강점(强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36년 동안 일제(日帝)의 식민통치를 받았었다. 이때 침략자는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약탈해 갔고,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기름진 쌀을 수탈했으며, 장정들을 징용으로 잡아다가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거나 광산으로 두더지처럼 몰아넣어 석탄을 캐도록 했었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필설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 보다 무려 세배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고려를 강점했던 몽고 치하 100년의 피폐상은 오래되어 의식하지 못할 뿐 일제를 능가하여, 고려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삼별초를 앞세운 무신정권의 대원항전(對元抗戰)이 수포로 돌아가서 무릎을 꿇은 후, 수도는 다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겨지고, 정권은 무신에서 왕과 문신에게로 돌려졌지만, 이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형제국에서 신하국으로 강등된 고려에게 원나라는 인삼 같은 고을의 각종 특산품을 진상하도록 요구했다. 특이한 것은 군사용으로 길들여진 매를 원하여 이때 고려에는 매가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원나라는 고려를 무릎 꿇린 후 다음으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라는 관부(官府)를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탐라(耽羅)에 목마장(牧馬場)을 두고 전함(戰艦)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후 쿠빌라이 칸은 자신의 사위인 충렬왕을 시켜 일본정벌을 단행하도록 명한다. 1차 2차에 걸쳐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정벌에 나서는데, 이때 고려는 병사뿐만 아니라 군함 900척을 비롯한 전쟁 물자 전반을 담당했었다. 두 번의 원정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고려는 인명 손상이외에 국가 재정이 파탄날 만큼 큰 경제적 피해를 입었었다.

 

원나라는 고려를 희생양으로 삼아 승산 없는 전쟁을 벌여 패한 뒤에도 전쟁을 위해 세웠던 정동행중서성를 폐지하지 않고, 그것을 고려 수탈의 창구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와 같은 곳이 정동행중서성이다. 우선 원나라는 이 기구를 통해 고려여인들을 공녀(貢女)로 받치기를 요구하였다. 부족한 여자를 고려에서 받치는 공녀로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고려의 꽃다운 여인들이 몽고로 보내져 성적 충동의 하수구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도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공녀 중 일부는 황실이나 귀족의 집으로 보내지는데, 행세깨나 하는 권력자면 아리따운 고려여인을 첩실로 두는 유행이 생겼을 정도였다. 고려에서는 이때 조기 결혼을 시키는 풍조가 생겼다. 서두르지 않으면 딸을 오랑캐들의 노리갯감으로 받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망하면 여자들이 이런 수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환향녀(還鄕女)는 원나라로 보내졌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이르는 말이다. 거기에는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 이외에 몸으로 살았던 여자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

 

원나라의 연경에는 고려여인들이 가져온 고려식 패물과 고려떡 같은 것이 인기를 끌었고, 고려의 개경에는 몽고식 헤어스타일과 몽고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즐비하게 생겨났다. 단발령에 따라 상투를 자르고 당꼬바지를 입는 것이 유행되었던 일제 강점기보다 더 질펀하게 몽고스타일이 유행했었다. 세계를 제패한 싸이의 강남스타일 같은 가공할 위력으로 몽고스타일이 개경을 강타했었다고 보면 된다. 조금만 더 이런 상태가 지속되었다면 고려는 그때 이미 막을 내렸을 것이다.

 

고려왕의 시호 중 충성 충(忠) 자가 붙은 왕들이 모두 원 강점기 때 원나라에 충성하기를 강요받았던 왕들이다. 25대 충렬왕(忠烈王)이 원나라에 굴복하고, 신하가 되어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던 첫 번째 왕이다. 26대 충선왕(忠宣王)도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 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보았었다. 27대 충숙왕(忠肅王) 28대 충혜왕(忠惠王) 29대 충목왕(忠穆王)으로 이어지는데 충목왕도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해서 보위에 오른 다음 어머니 덕녕공주가 섭정을 한 원나라의 꼭두각시였다. 12세에 즉위한 30대 충정왕(忠定王)은 외척인 윤시우와 배전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 만에 폐위된다. 그 뒤를 이어 31대 공민왕이 보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의 동복아우다. 초명은 기(祺), 이름은 전(顓)이고 바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라는 몽고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공민왕의 어머니는 덕비 홍씨로 원나라 공주가 아닌 고려 여성이었다. 1330년에 태어난 공민왕은 12살 때 전례에 따라 볼모로 원나라 수도인 연경으로 보내진다. 조카인 충정왕이 폐위되어 1351년 12월 귀국할 때까지, 대략 그곳에서 10년을 살았었다. 그는 이때 그림과 글씨를 익혔는데, 고려 역대 왕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을 남길 만큼 예술적 성취도가 높았던 사람이다. 그 사이 두 차례의 왕위 계승에서 실패하다가 21세 때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보타시리(寶塔實理)와 결혼하면서 보위에 오르는 찬스를 잡은 것이었다.

 

공민왕은 연경에 오래 살았던 덕분에 원의 내정을 환히 알고 있었다.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원나라의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간파한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몽고식 변발을 풀어헤치고 원나라 옷을 벗어 던진 다음 고려왕 복장을 하는 것으로 영토와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원나라에 보내졌던 공녀 중에 속칭 제일 출세한 여자가 기황후다. 순제의 눈에 들어 태자 애유식리달랍을 낳으면서 일약 제2 황후로 격상, 핵심 권력자로 부상하게 된 그녀에게는 기식·기철·기원·기주·기륜 등등의 형제가 있었다. 여동생의 후광을 입고 막강한 권력과 부를 축적한 형제들은 고려왕에게 신(臣)이라고 말하지도 않을 만큼 오만 방자했었다. 대국의 황후가 누이이기 때문에, 사위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보다 자신들이 더 높다고 여긴 무례를 저지른 것이었다.

 

친원파 가운데는 기씨 형제 외에도 조일신∙노책∙권겸 등이 있었다. 조일신이 친원파의 수장이며, 노책은 딸을 원나라 태자비로 바치고 집현전 학사가, 권겸은 딸을 원나라 황태자비로 바치고 태부감 태감이 된 무리들이었다. 공민왕이 조일신을 제거하자, 입지가 좁아진 기씨 형제들은 무엄하게도 공민왕을 폐위시키려 하였다.

 

역모를 눈치 챈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년) 연회를 베푼다고 속여 대궐로 기철 일당을 불러들였다. 기철과 권겸은 궐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철퇴를 맞았고, 노책은 집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후 기철의 아들 기유걸·기완자불화, 노책의 아들 노제, 권겸의 아들 권상화 등 친원 세력이 일망타진되었다.

 

기황후는 자신의 일족들이 공민왕에 의해 제거되자 원한을 품었다. 이런 점을 이용하여 최유라는 자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1364년(공민왕 13년) 1월 1일 최유는 마침내 원나라 군사 1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를 포위했다. 공민왕은 최영과 이성계로 하여금 대적케 하였다. 최유는 두 장수의 협공을 받고 기세가 꺾여 원나라로 달아났다. 이후에도 최유는 계속해서 본국을 헐뜯으며 다시 침공할 기회만을 엿보았지만, 국력이 쇠퇴한 원나라는 고려와의 불화를 원치 않았다. 원의 순제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서 공민왕의 복위를 승인하는 조서를 내리는 유화정책을 펴는 한편 최유를 포박하여 고려로 압송시키고 덕흥군은 영평부로 귀양 보냈다. 최유는 이해 11월에 고려에서 처형되었다.

 

고려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존립이 위태로워진 것은 내부의 부패에 더 큰 원인이 있었다. 기씨 형제들뿐 아니라 권신(權臣)들은 거의가 사병과 농민들로부터 수탈한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노동을 제공하는 것으로 연명하는 노비로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조공을 받칠 평민이 줄어들면서 국가 곳간이 텅 비었다. 나라 살림이 파탄일로로 치닫자 개혁의지를 높이든 공민왕은 아무 기득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승려 신돈을 과감하게 기용하여 그로 하여금 썩은 환부를 도려내도록 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였는데, 토지와 노비를 혁신시키는 기관이 전민변정도감이다. 신돈은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의 기한을 주고 그동안 권세가와 호족들이 불법으로 탈취했던 전민(田民)을 원위치로 돌리게 했다. 또한 양민이 되기를 호소하는 천민이나 노예는 모두 소원을 들어주었다. 권문세가는 신돈의 처사에 대해 격분했으나,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신돈을 성인이라고 찬양하였다.

 

신돈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권문세족에 대항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느낀 공민왕과 신돈은 기존의 세력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신진사대부들을 양성한 다음 과거를 통해 실력 있는 신진들을 발탁하였다. 이들이 나중에 썩은 고려의 권문세가들을 몰아내고 조선을 건국하는 세력으로 자라난 것이었다.

 

신돈은 공민왕의 확고한 지지를 기반으로 개혁을 일사불란하게 추진했다. 그는 석 달 만에 공민왕이 늘 불안하게 느끼던 대신들을 파면 축출하고 파벌을 해체 시켰다. 최영도 이때 귀양 보내졌었다. 연복사에서 문수회를 벌일 때 신돈이 설법하다가 전밖에 몰려 있는 여자들을 보았다. 그는 공민왕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선남선녀들이 윗자리로 올라와 문수보살과 인연 맺기를 원합니다. 부녀자들로 하여금 전(殿) 안으로 들어와 설법을 듣게 해주십시오.”

설법을 베풀 때 부녀자들은 전의 바깥에 있는 것이 당시의 의례였다. 이때 처음으로 부녀자들이 전안에 들어와 설법을 듣는 관례를 만들었다. 신돈은 자주 불사를 벌였는데, 낙산사를 짓고 난 뒤에 연이은 흉년 끝에 풍년이 들어 공민왕을 흡족하게 하였다. 공민왕이 30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아들이 없자 연복사에서 문수회를 베풀어 득남을 기원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민왕과 신돈이 함께 펼친 의욕적인 개혁정치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사단은 공민왕 14년에 노국공주가 후손을 생산하려다 난산 끝에 사망하면서 발생했다. 공민왕이 연경에 볼모로 보내져 외롭게 보내던 시절에 만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서 한을 달래던 옆에서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던 노국공주는 원나라 출신이지만, 고려로 시집왔으니 자신도 고려인이라며,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개혁정치를 반대는커녕 열렬하게 지지했었다. 공민왕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노국공주 덕분이었다. 사랑하던 아내를 잃은 공민왕은 초상화를 벽에 걸어놓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울뿐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공민왕은 왕비가 죽은 뒤로 계비를 맞이하여 신돈과 함께 불공을 드렸으나 역시 후사를 얻지는 못했다. 이 무렵 공민왕은 신돈의 집을 자주 드나들다 신돈의 노비였던 반야라는 미인을 보고 총애하였다. 공민왕의 사랑을 받은 반야는 1365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나중 공민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우왕이다. 우의 아명은 모니노다.

 

재위 초반 고려의 자주독립과 여러 개혁정치에 노력을 기우린 공민왕이었지만, 복잡한 국제정세 속 반란과 잦은 전쟁은 공민왕의 인격을 파탄 냈고,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그를 폐인으로 만들었다. 절제와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그가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뒤에는 고독감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지나치게 성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이쯤되자 전대 왕들의 사치를 비판하며 백성의 생활을 걱정하던 공민왕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신돈은 정신을 못차리는 공민왕을 내치고 우왕을 보위에 올리는 역모를 계획했다가 탄로나면서 처형된다. 이로써 공민왕과 신돈이 손잡고 함깨 추진했던 개혁정치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집권 말기로 접어든 공민왕시대의 고려는 혼돈 그 자체였다. 공민왕은 자제위(子弟衛)를 만들어 나이 어린 미소년들을 뽑아 드린 다음 그들과 동성애를 즐기거나 관음증에 빠져 지냈다. 자제위는 명목상 왕의 경호를 위해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한 것이지만, 근위 경호는 이름뿐이고, 공민왕은 그들을 측근에 두고 난교파티와 동성애에 빠져 지냈다.

 

공민왕은 태후가 우를 세자로 허락해 주지 않자, 다시 후사를 걱정하였다. 공민왕은 홍윤·한안 등 자제위 출신들과 그의 비빈들을 억지로 간음하게 하여 왕자를 얻으려는 희망을 품었다. 정비·혜비·신비 등 3비가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공민왕은 마지막으로 익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익비도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칼로 위협하여 김흥경과 홍윤·한안 등이 간음하도록 시켰고, 그 결과로 익비는 임신이 되었다.

 

공민왕은 비밀 유지를 위해 익비를 임신시킨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없애려고 하다가 역습을 받았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 밤 최만생과 홍윤 등이 술 취해 잠이든 공민왕을 칼로 마구 찔렀다. 대전 침실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벽에는 공민왕의 뇌수가 튀어 붙었다. 고려의 등불 같은 개혁군주 공민왕은 무절제한 동성애에 빠지면서 이처럼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공민왕 시해에 가담한 최만생·홍윤·한안·권진 등은 능지처참되고 그들의 나머지 친족도 모두 잡혀 유배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공민왕의 바이오코드는 0625다. 이 코드는 매우 열정적으로 일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매사에 적극적이며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무슨 일이라도 완전무결하게 잘 하고 싶은 마음도 강하다. 공민왕은 원나라 수도인 연경에 볼모로 잡혀가 10년간 갖은 고초를 겪은 후 고려왕이 되었다. 자유분방함을 구가하는 이 코드가 억압을 받은 스트레스 반응으로 상처받은 자존심의 충족을 위한 복수심을 키웠을 것이다.원나라에 맞서 싸워 100여 년간 빼앗겼던 함경도 철령 일대 쌍성총관부 땅을 되찾은 일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0625의 캐릭터는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적토마와 같다. 하늘까지 뛰어오를 듯한 힘찬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사색을 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생각한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 또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파격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아 종종 주위 사람들을 당황케 한다. 이러한 성격으로 공민왕은 아무런 기득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신돈을 과감하게 등용시켜 전광석화처럼 개혁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따분하고 지루한 것을 못견뎌하는 0625는 어떤 일이든 밝고, 활기차게 추진하며 화려한 결실을 맺게 되기를 바란다. 공민왕은 고려가 끊임없는 개혁을 통해 화려하게 비상하기를 꿈꾸었었다.

 

0625코드를 가진 지도자는 집단에 활력을 불어 넣지만 너무 서두르거나 힘이 넘쳐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절취부심하다가 보위에 오른 공민왕은 목적한 바를 빨리 얻으려고 속도위반을 했고, 그가 건설하고 싶었던 고려는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그래서 과욕을 부린 감도 없지 않다. 여름코드만 있던 관계로 국사를 처리할 때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쪽보다 감정적인 면으로 치우친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0625의 제일 큰 장점은 부단히 움직이는 정열에 있다. 결코 탁상공론이나 하는 몽상가가 아니다. 실천을 앞세우는 행동가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실패할 수 있는 요소를 감지하는 능력, 즉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단력을 기르도록 훈련해야 한다.  

 

공민왕의 친필 현판

 

이 코드의 단점은 세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심함과 미시적인 안목을 키우는 훈련을 반복해서 하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되어 독창적인 재능을 뽐내는 예술가로 대성할 수도 있다. 공민왕이 천산대렵도(千山大獵圖)를 그린 화가가 된 것이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공민왕은 글씨에도 능해서 안동에 하사한 「안동웅부(安東雄府), 「영호루(映湖婁)」등의 현판이 현존한다.

 

0625는 매우 부지런하고 활동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이 주위에는 부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를 갈망하는 0625는 인생에서 언제나 중심 역할을 하기를 바라고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지만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는 게으르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 사소한 수고를 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실패도 폭넓지 못한 인간관계와 사회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코드는 본래 영리하지만 지적인 것보다는 본능적인 것에 가깝다.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직관을 따르기를 좋아한다. 명상을 할 수도 있지만 음악이나 사냥 같은 운동을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사랑에 집착한다. 사랑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던 노국공주가 죽고 나자 대상을 잃은 공민왕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표류하면서 스트레스 반응으로 호르몬 분비의 이상이 생겼고, 동성애에 빠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맞이하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열정은 대상을 상실할 때 염세와 엽기로 흐른다. 눈부신 태양을 듬뿍 받고 화려하게 피어난 열정적인 6월 장미도 벌레가 먹으니 추한 잔해를 남기며 시들어버리고 만 형국이다.

 

0625는 빠르다.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나온다. 따라서 0625가 기분이 좋아서 늘어져 있을 때 설득해야 한다. 기분이 나쁠 때는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받아 드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0625의 부하나 비서관들은 자신의 상사가 현재 어떤 기분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복종하는 듯한 인상을 줄수록 좋다. 공민왕의 그런 성격을 분석할 능력이 있었다면 신돈도 실각되는 불행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돈은 썩을 대로 썩었던 고려 말 환부를 도려내는 개혁정치를 단행했던 사람이다. 절대 요승은 아니지만 공민왕의 마음을 읽어내는데 실패하여 실각한 것을 보면 부처님 같은 인격과 신통 자재력을 이룬 고승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보현행은 빛을 잃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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